지금이야 이태원은 물론이고 번화가 어디서나 수제버거집 하나 정도는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수제버거는 생소한 메뉴였습니다. 맥도날드나 롯데리아, KFC 등의 패스트푸드점 말고는 햄버거를 맛볼 수 있는 곳이 드물었죠. 한국에 프리미엄 수제버거 열풍을 몰고 온 브랜드로는 일본의 ‘프레시니스 버거’와 한국 토종 브랜드인 ‘크라제 버거’를 꼽아볼 수 있을 텐데요. 한때 신선한 외식 메뉴로 사랑받던 크라제 버거를 지금은 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을까요? 오늘은 한국 토종 브랜드 크라제 버거의 탄생과 성공, 그리고 몰락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국내 프리미엄 버거 시장의 선두주자


크라제 버거는 1998년 압구정에 1호점 문을 연 한국 토종 브랜드입니다. ‘크라제’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에는 야심만만 한 속뜻이 숨어있는데요. ‘모든 사람들이 우리 햄버거를 미치도록 좋아하게 만들자’는 의미에서 대한민국(Korea)과 열풍, 유행(craze) 두 단어를 조합한 것이죠. 자본금 3억 원으로 시작한 크라제는 2년 뒤 ‘크라제 코리아’라는 이름의 법인을 설립하고, 한국 외식 시장에 본격적으로 프리미엄 수제버거를 소개합니다.

햄버거를 ‘맛있지만 몸에 나쁜 음식’, ‘대충 끼니를 때우기 위한 음식’으로 인식하고 있던 한국 사람들에게 칠리, 마늘 플레이크, 버섯 등 다양한 토핑으로 맛을 낸 크라제 버거는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양도 푸짐했는데요. 둘레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큼직한 재료들이 먹음직스럽게 쌓여 꽤 높은 높이를 자랑했고, 어지간히 입이 큰 사람이 아니라면 한입에 베어 물기 어려울 정도였죠.


2011년 매출 366억 원, G20 정상 회의 간식 제공도


수제버거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일찍 선점한 데다 압구정, 대치동, 가로수길 등 비교적 물가가 높은 동네에 우선적으로 매장을 낸 고급화 전략까지 먹혀들면서 크라제 버거는 승승장구합니다. 전성기에는 43개의 직영매장을 포함한 100여 개의 점포를 운영했고. 매년 2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했죠. 해외에도 진출했습니다. 미국, 싱가포르, 상하이, 마카오 등지에 크라제 버거 매장이 문을 열었죠.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 회의에서 크라제 버거가 각국 장차관, 교섭대표, 취재기자단에게 간식으로 제공되기도 한 크라제 버거는 2011년 무려 366억 원의 매출을 달성했습니다.


무리한 확장, 트렌드 변화로 시작된 몰락


그러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2011년 최고 매출을 찍었을 당시 영업이익은 오히려 적자로 전환된 상태였죠. 그해 4억 원이던 적자는 이듬해 57억 원으로 불어났고, 부채 비율도 133.07%에서 1740.25%까지 늘어났습니다. 수익이 적게 나는 직영점 18 곳, 가맹점 10 곳이 문을 닫았고, 100 곳에 달하던 점포 수는 2012년 연말 70 곳 수준으로 줄어들었죠. 2013년에도 폐점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잘나가던 크라제는 왜 이런 위기에 봉착한 것일까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리한 사업 확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크라제는 2009년 의료기기 생산 업체인 제넥셀세인 지분을 인수하기로 계약했는데요. 코스닥 상장사인 제넥셀세인을 통해 우회상장을 하려는 계획이었죠. 하지만 제넥셀세인 소액주주들의 반대에 부딪혀 증시 입성은 좌절되었고, 상장을 위해 무리하게 몸집을 불린 여파는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해외 매장이 안겨준 손실도 컸습니다. 2012년 연말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 법인의 손실은 총 100억 원에 달했죠.

시시각각 변화는 소비자 입맛과 외식 시장의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한 것도 크라제의 몰락 원인으로 꼽힙니다. 사실 신세계 푸드로부터 이미 가공된 패티를 제공받는 크라제 버거는 완벽한 ‘수제버거’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더 푸짐하고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매장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조리하는 가게들이 이태원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죠. 크라제 햄버거 단품이 8천 원~1만 원에 달하는데, 그 돈이면 더 제대로 된 수제버거를 사 먹을 수 있었던 겁니다. 햄버거에 높은 금액을 투자하기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예전에 하던 대로 패스트푸드점에서 보통의 햄버거를 사 먹으면 그만이었죠.

2차 법정관리에 이른 사업 청산


크라제는 2013년 11월에 결국 기업 회생 절차를 신청했고, 2014년 3월, 나우 IB 캐피털의 사모펀드에 출자한 삼양식품이 크라제를 인수합니다. 삼양은 크라제 제2의 전성기를 기대하며 크라제 MEX, 크라제 그린 등 새로운 브랜드를 출시했죠. 그러나 소비자들의 반응은 여전히 뜨뜻미지근했고, 크라제는 오히려 모기업인 삼양식품의 재무구조에까지 악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가맹점 사업자가 360억 대의 소송까지 제기하면서, 크라제는 다시 한번 법정관리에 들어갑니다. 재매각도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크라제를 사들이겠다는 기업이 정말 나타나지 않았죠. 법원은 기업회생 절차를 밟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해 크라제버거의 회생 절차를 폐지합니다. 크라제 버거를 운영하던 법인 ‘크라제 인터내셔널’은 파산했지만, 상표권 등의 자산은 LF 푸드가 10억 원대에 사들여 활용 중인데요. 지난해 간편조리식품의 형태로 ‘크라제버거 함박스테이크’ 3 을 론칭한 바 있습니다.

지금까지 크라제 버거의 탄생과 인기 비결, 그리고 몰락 요인과 그 과정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한동안 메뉴 자체의 신선함과 고급화 전략으로 큰 인기를 끌었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과 해외 진출, 외식시장 트렌드의 변화 등으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었음을 알 수 있었죠. 몇 군데 매장만을 남겨둔 채 간편조리식품으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크라제 버거가 언젠가 브랜드 이름에 걸맞은 버거 프랜차이즈로 부활할 수 있을지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