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라라랜드

미아와 세바스찬이 가로등 불빛 아래서 탭댄스를 추던 영화 ‘라라랜드’의 한 장면, 모두 기억하시나요?  투닥대듯 호흡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의 춤도 멋졌지만 탁탁탁 발 구르는 소리, 쓱-하고 바닥을 긁는 소리도 음악과 어우러져 신나고 설레는 분위기를 연출했죠. 영화 제작 과정에는 이런 발소리부터 술잔 부딪히는 소리, 심지어 화장실에서 일 보는 소리까지 모든 생활의 소리들을 연출하는 분들이 참여한다고 하는데요. 바로 오늘의 주인공, 폴리 아티스트들이죠.

‘또 오해영’의 에릭이 하는 일


출처 : 드라마 ‘또 오해영’, 영화 ‘봄날은 간다’

2016년 인기리에 방영한 ‘또 오해영’ 속 박도경(에릭 분)은 예민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영화 음향감독입니다. 극 중에서 에릭 씨가 보여주는 일하는 모습이 폴리아티스트들의 작업과 유사하다고 생각하시면 되는데요. 주변의 온갖 도구를 이용해 실생활에서 있을 수 있는 소리들을 창조하는 직업으로, 촬영 당시 녹음한 소리를 편집하는 ‘다이얼로그 에디터’나 ‘사운드 이펙트 에디터’와는 조금 다릅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연기한 ‘상우’도 폴리 아티스트라고 볼 수 있죠. 영화에서는 ‘사운드 엔지니어’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요.

폴리 아티스트의 등장


출처 : 드라마 ‘또 오해영’

폴리 아티스트의 ‘폴리’는 어디서 나온 말일까요? 1930년대 미국 할리우드에서는 잭 폴리( Jack Foley)라는 인물을 ‘효과음 계의 전설’이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폴리는 이미 촬영된 영상에 효과음을 입힌다는 발상을 처음 실행에 옮긴 사람인데요. 폴리 아티스트(Foley Artist)라는 명칭은 이 사람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폴리는 발소리만으로도 영화 캐릭터를 표현했다니, ‘단순 골절과 복합골절의 소리를 구별’하고 ‘햇빛 드는 소리’까지 만들 수 있다는 ‘또 오해영’ 박도경의 캐릭터도 잭 폴리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에도  이렇게 라디오·TV 드라마를 위한 음향효과를 제작하는 분들이 쭉 계셨지만, 1990년대까지는 ‘음향효과맨’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죠. 한국에 폴리 아티스트라는 직업명이 들어오기 시작한 건 2000년대부터입니다.

상상초월 도구로 상상초월 소리 제작


일상의 움직임에서 자연스럽게 나는 소리들도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모두 폴리 아티스트들의 작업을 거쳐 탄생합니다. 옷깃을 스치는 소리, 음료의 뚜껑을 여는 소리 등, 대사 이외의 거의 모든 소리가 이들의 몫이죠.

출처 : 나는 왕이로소이다 / 월간 TOOL

11년차 폴리 아티스트 정지수 씨는 <위클리 공감>과의 인터뷰에서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위해 배변하는 소리를 연출했던 경험을 털어놓은 바 있습니다. 대변이 나오는 소리,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등을 구현하기 위해 그는 점토와 식빵, 바나나, 헤어젤, 케첩 등을 사용했다는데요. 꽤나 리얼한 결과물이 나와 감독님이 ‘진짜 화장실에서 일 보며 녹음한 거 아니냐’고 묻기까지 하셨다네요.

라디오 드라마 제작에 주로 참여하는 베테랑 폴리 아티스트 안익수 씨는 가장 만들기 어려운 소리로 ‘옷소리나 발자국 소리’같은 사람의 움직임이 반영되는 섬세한 소리들을 꼽습니다. 배우의 호흡에 딱 맞아떨어지도록 연출해야 하기 때문인데요. 특히 발소리는 가장 기본이면서도 여전히 어려운 과제라고 합니다. 성별에 따라, 인물의 감정 상태에 따라, 맨정신인지 술이 취했는지에 따라 발소리도 천차만별이니까요. 안익수 씨는 온갖 신발들을 종류별로 갖춰놓고 상황에 맞춰 소리를 녹음한다네요.

폴리 아티스트가 되는 길


쉽게 상상하기 힘든 도구들을 가지고 일상의 소리를 창조하는 일이 꽤 매력적으로 느껴지는데요. 폴리 아티스트가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걸까요?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아직 폴리 아티스트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없습니다. 대학교 전공 중에서는 ‘음향제작과’에서 가장 유사한 공부를 할 수 있고,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종종 교육을 위한 인턴을 선발하기도 한다네요.

출처 : 드라마 ‘또 오해영’

폴리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 기상천외한 도구까지 떠올릴 수 있는 상상력도 필요하지만, 사소한 것들을 흘려보내지 않는 집요함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정지수 씨는  특이한 신발을 신은 사람의 발만 쳐다보며 걷다 보니 주변의 소음 속에서도 그의 발소리만 선명하게 울리는 경험을 했다는데요. 이후 다양한 발소리에 귀 기울인 결과, 배우 특성에 맞는 발소리를 연출하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고 합니다.

출처 : C 영상미디어

안익수 씨는  길 가다 마주친 헌 물건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습관이 생겼답니다. 고장 난 물건들도 의외의 역할을 하죠. 남대문 시장에 장난감 가게에서 발견한 고장 난 나팔은 뜻밖에도 코끼리 소리를 내는 바람에 한동안 요긴하게 썼다고 합니다. 요즘은 미리 만들어진 음향 자료로 동물 소리를 입히긴 하지만요.

폴리아티스트 정지수 씨와 안익수 씨는 각각 영화와 라디오라는 다른 분야에서 일하지만, 폴리 아티스트라는 직업의 매력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를 냅니다. 일이 고되고 정신적인 부담이 크지만 영화와 라디오, 그리고 소리만이 줄 수 있는 매력 때문에 이 직업을 그만둘 수 없었다고요. “밤샘 작업을 밥 먹듯 할 거라는 오해와 달리, 일정을 유동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정착되고 있다”며 이 일에 관심 있는 후배들을 환영한다는 말도 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