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6월 7일, 이건희 회장은 일주일간의 회의가 이루어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계열사 사장들에게 고강도 혁신을 주문했습니다. ‘신경영 선언’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이 혁신 의지는 삼성이 수많은 굴곡을 거쳐 지금의 위치까지 오는 발판이 되어주었죠. 신경영 선언 26주년을 목전에 앞둔 지금, 삼성은 다시금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메모리 반도체의 위축, 미중 무역전쟁으로 인한 국제 경제의 불확실성, 그룹 전반으로 확대된 삼성 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수사 등이 삼성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죠.

여러가지로 상당히 불안정한 상황에도 움츠러들기는커녕, 이재용 부회장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경영 보폭을 넓혀갑니다. 문대통령에게는 “진짜 실력은 지금부터”라며 자신감을내비쳤고, 임직원에게는 “단기성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장기적이고 근원적인 기술 경쟁력 확보에 집중할 것”을 강조했죠. 그러나 국내 1위 그룹 총수로서 믿음직스럽다는 평가를 받는 이 부회장의 이런 모습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야심 차게 준비한 사업이 공중분해되며 ‘무능력한 황태자’라는 질타를 받은 적도 있었죠. 오늘은 이재용 부회장이 손댔다가 씁쓸한 실패를 맛봐야 했던 e 삼성 비즈니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야심 차게 준비한 인터넷 벤처 투자 사업체


인터넷이 만들어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로 전 세계가 들썩이던 2000년 5월, 이재용 당시 상무보는 e 삼성과 e 삼성 인터내셔널을 설립합니다. 자본금 400억 원을 들인 두 사업체는 삼성의 인터넷·벤처기업 투자를 위한 인터넷 벤처 지주 기업이었죠. 미국에서 가장 큰 인터넷 기업이었던 AOL의 주가가 1000억 불을 호가하고 크고 작은 IT 관련 회사들이 쉼 없이 탄생하던 당시의 분위기를 떠올려보면, 삼성이 관련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였습니다.

사업체 설립 당시 출자자로 나선 이재용 부회장은 국내 벤처 투자를 담당할 e 삼성의 지분 60%, 해외 벤처 투자를 맡은 e 삼성 인터내셔널 지분 55%를 보유했고, 2000년 7월까지 삼성의 인큐베이터 안에서 오픈타이드코리아, 이누카, 가치네트 등 총 14개의 인터넷 기업이 생겨났습니다.


닷컴 버블의 붕괴


그러나 낙관적인 전망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초기 단계를 막 벗어났을 뿐인 인터넷 기술은 예상만큼 사용자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했고, 느린 서비스와 함께 발생한 각종 문제들은 웹 서비스에 대한 불신을 키웠죠. 인터넷 관련 산업이 기존의 산업을 뛰어넘을 것이라 예측한 투자자들 덕분에 한동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벤처기업의 주가도 곧 맥없이 꺼지기 시작합니다.

투자한 회사들이 줄지어 적자를 내는 상황이었으니, e 삼성과 e 삼성 인터내셔널의 손실은 불가피했습니다. 설립 첫해인 2000년 e 삼성과 6개 해외법인의 총 적자는 141억 원, e 삼성 인터내셔널의 적자는 76억 원에 이르렀죠.


계열사가 해결해 준 시행착오


설립일로부터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2001년 3월, 이재용 부회장은 지분을 모두 처분하고 인터넷 비즈니스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합니다. e 삼성 보유 주식 240만 주는 제일기획이, e 삼성 인터내셔널 보유 주식 480만 주는 삼성 SDS가 300만 주, 삼성SDI와 삼성 전기가 각각 90만 주씩 사들였죠. 그 외 가치네트와 시큐아이닷컴 등의 주식도 삼성카드, 삼성 캐피털, 삼성증권, 에스원 등에 넘겼습니다.

오너 3세의 시행착오 때문에 손실 회복의 가능성조차 불확실한 사업체들을 계열사가 떠안는 상황이 발생하자, 이재용 부회장을 향한 비난이 쏟아집니다. 영국 매체 <파이낸셜 타임스>는 “실패한 닷컴 기업을 살리는 쉬운 방법은 아빠의 기업에 팔아버리는 것”이라며, 이 부회장이 박사 과정을 밟은 하버드 경영 대학원은 이런 식으로 가르치느냐고 비꼬기까지 했죠. 게다가 이재용 부회장에게는 금전적 손해조차 없었습니다. 이 부회장 및 관련인들이 해당 사업에 출자한 돈은 505억 원인데, 계열사들이 지분 인수 대가로 지불한 총액은 511억 원이었으니까요.


계열사와 임직원에 미친 영향


비판의 화살이 이재용 부회장을 향하자, 삼성 측은 ‘인터넷 사업 정리는 경영 수업에 전념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입장을 내놓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도 ‘계열사의 부당 지원이나 특혜는 없었다’고 발표했고, 2007년 조준웅 삼성특검 역시 e 삼성 지분 계열사 매각 관련 경영진의 배임 혐의에 대해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죠.

이재용 부회장은 법적인 책임에서 벗어났지만, 피해를 떠안은 쪽은 존재합니다. 이 부회장을 배임혐의로 고발했던 참여연대의 자료에 따르면 제일기획은 사업상 별 관련도 없는 e 삼성을 208억 4천만 원에 사들였고, 2004년 말에는 그 가치가 55억 7천만 원으로 하락하는 바람에 152억 6천만 원에 달하는 손해를 봤다는데요. e 삼성에 근무하며 주식을 배당받았던 일반 직원들 역시 나날이 떨어지는 주가를 보며 울상을 지을 뿐, 별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죠.

e 삼성 문제는 이건희 회장의 건강 악화로 경영승계 작업이 본격화되었던 2014년에도 이 부회장에게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실패의 결과물을 계열사에 떠넘긴 전력은 경영인으로서의 자질을 의심케한다며, 2010년부터 호텔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이 이건희 회장의 후계자로서 더 적합하다는 목소리도 나왔죠.

‘e 삼성과 e 삼성 인터내셔널은 후속 투자 계획이 없어 청산되었을 뿐 크레듀, 오픈타이드 코리아 등 존속 사업체들은 차후에 성공을 거둬 이익을 냈으니 완전히 망한 사업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인터넷 사업이 이재용 부회장의 지울 수 없는 흑역사가 된 것만은 분명한데요. 이건희 회장의 와병 중에 삼성에 닥친 어려움을 이 부회장이 어떻게 타개할지, 전과 다른 위기 극복 능력을 보여주며 과거의 실패를 만회하고 차기 그룹 회장으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는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