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되면 북한을 방문하고 싶어요” 기자들이 놀라 다시 펜을 들었습니다. 드레스덴 평화상 수상 이후 벌어진 일인데요, 이들의 앞에는 담담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힌 한 아시아계 여성이 서 있었습니다. 대체 그녀가 누구기에 상을 받고, 이런 말까지 할 수 있었던 걸까요?

전쟁을 뒤집은 사진 한 장

이 사진을 아시나요? 이 사진은 베트남 전쟁을 멈춘 사진으로 평가되는 ‘베트남-전쟁의 테러’라는 이름의 작품입니다. 한때 전 세계 언론사가 이 사진을 일면에 보도했죠. 덕분에 사진기자는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이 사진은 ‘모든 시대에서 가장 상징적인 전쟁 사진 중 하나’로 평가되어 20세기 미국 최고의 1000개 저널리즘 작품 중 41위에 랭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 속 벌거벗은 채 도망치는 소녀가 바로 평화상을 수상한 판 타이 킴 푹(Phan Thị Kim Phúc)입니다. 사직이 찍힌 1972년 6월 8일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킴 푹은 고작 아홉 살에 불과한 소녀였습니다. 당시 베트남은 게릴라에 대한 미국의 네이팜탄 폭격을 심심찮게 받고 있었죠. 네이팜탄은 현재 불꽃이 잘 꺼지지 않고 달라붙어 불필요한 살상을 한다는 이유로 민간인 구역에 사용이 금지된 무기입니다.


당시 서쪽 짬방 마을이 폭격당하자 킴 푹을 포한한 주민들은 인근 사원으로 피신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베트남 군인으로 착각한 미군이 사원에 네이팜탄을 투하하면서 비극이 일어났죠. 즉시 아이들은 탈출했지만, 킴 푹의 옷에 불이 붙고 말았습니다. 살기 위해 팀 푹은 옷을 벗어던진 채 달렸고, 이 모습이 당시 AP 통신 사진기자인 닉 우트의 카메라 앵글에 잡혀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치료 거부부터
정치 선전물로 전락

사진을 촬영한 닉 우트는 즉시 소녀에게 물을 뿌린 뒤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2017년 64세 나이로 은퇴하며 “농 콰, 농 콰”(너무 뜨거워요)라던 소녀의 비명을 아직도 기억한다고 밝혔습니다. 병원이 치료를 거부하자 취재지원 비표를 내미며 사정하고 “병원이 치료를 거부했다”라는 설명이 사진과 함께 전 세계에 보도될 것이라 협박까지 했죠. 그는 “그녀가 죽었다면 나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 모른다”라고 털어놓았습니다.


당시 킴 푹은 몸의 30%에 3도 화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흰색 반점은 모두 피부가 벗겨져 진피가 드러난 모습이죠. 이후 14개월 동안 17번의 피부이식이 진행된 뒤에야 킴 푹은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 공산당에 의해 반미 여론 형성을 위한 정치 선전물로 이용되었죠.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 끝에 의대에 진학했지만, 사진 속 주인공임을 안 공산당 지도자에 의해 퇴학당해야 했습니다. 1982년에야 사정을 안 베트남 수상 덕분에 쿠바 의대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정치 선전물로 사용하는 베트남의 행태에 1992년 캐나다로 탈출하는 모험을 단행했습니다.

전쟁의 피해자 킴 푹
밝혀진 그의 반전 근황

이후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 현재 그는 두 아이의 어머니입니다. 유학생활 중 만난 남편과 1992년 결혼해 신혼여행 도중 경유한 캐나다에서 함께 망명을 신청했죠. 이후 1997년 유엔 평화문화친선대사로 인명 된 뒤 킴 푹 재단을 설립해 전쟁고아와 피해 아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의 행보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2019년 독일 드레스덴 평화상 재단은 그에게 평화인권상을 수여했죠. 재단은 수여식에서 “그녀가 증오의 설파자들에게 인류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라며 “그녀의 위대한 행동이 전 세게의 본보기가 되었다”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습니다.

 

여전히 킴 푹은 전 세계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도 전 세계 전쟁고아와 평화운동을 위해 힘쓸 것이라고 밝혔죠. 그는 “더 이상 공포와 고통에 울부짖는 어린이로 보지 마세요. 평화를 호소하는 어린이로 봐주세요. 군인들도 역시 피해자죠. 우리는 똑같은 고통을 받았잖아요. 사랑하고 용서하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아픔을 딛고 일어난 팀 푹이 꿈꾸는 세상이 도래하길 기대해 봅니다.